인도·유럽어족과 그 이웃 언어들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시작해 볼까 합니다. 유럽과 서·남아시아에 고정되어 있던 눈을 잠시 한국으로 돌려봅시다. 아, 한국어 이야기를 할 건 아니고, 거기서부터 쭉 남동쪽으로 내려오면 됩니다. 남극까지 가지는 마세요! 무엇이 보이나요? 망망대해에 자잘한 섬들만 있다고요? 언어 이야기 한다면서 사람이 얼마나 사는지조차 의문인 이런 곳에 왜 데려왔나고요? 언어 다양성의 ‘바다’, 오세아니아에 잘 오셨습니다.

오세아니아의 언어상황

흔히 ‘오세아니아 = 오스트레일리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오세아니아를 ‘대륙’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호주 아대륙과 그 주변 섬들로 구성된 오스트랄라시아Australasia는 오세아니아를 이루는 네 지역 중 하나일 뿐입니다. 오세아니아의 나머지 넓은 영역은 인도네시아의 최동단으로 호주 북쪽에 위치한 뉴기니 섬과 그 주변 섬들로 구성된 멜라네시아Melanesia, 그 북쪽의 여러 섬들로 이루어진 미크로네시아Micronesia, 뉴질랜드와 하와이 제도, 이스터 섬을 잇는 폴리네시아 삼각형Polynesian triangle 안의 폴리네시아Polynesia로 삼분됩니다. ‘-네시아’라는 지명은 고대 그리스어 νῆσος /nɛ̂ːsos/ ‘섬’에서 온 것인데, 비슷하게 작명된 ‘인도의 섬들’ 인도네시아Indonesia는 (뉴기니 섬을 제외하면) 보통 오세아니아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오세아니아의 문화적 지역 구분. 뉴질랜드는 지리적으로는 오스트랄라시아에 포함됩니다. 파란색 삼각형은 뉴질랜드, 하와이, 이스터(라파누이)를 잇는 폴리네시아 삼각형입니다.

오스트랄라시아에서는 현재 주요 언어가 영어이지만, 영국이 이 지역을 식민지화하기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다양한 호주 토착 언어들Australian Aboriginal languages이 쓰이고 있었고, 호주 남동쪽의 태즈메이니아 섬에서는 1905년 완전 사멸한 태즈메이니아 언어들Tasmanian languages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언어들에 대해서는 좀 더 뒤에 다루겠습니다. 참, 오스트랄라시아는 ‘아시아의 남쪽’이라는 뜻입니다. 멜라네시아,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는 각각 고대 그리스어 μέλᾱς /mélaːs/ ‘검은’, μῑκρός /miːkrós/ ‘작은’, πολύς /polýs/ ‘많은’에서 온 이름이니 ‘검은 (피부의 사람들이 사는) 섬들’, ‘작은 섬들’, ‘많은 섬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멜라네시아 최대의 섬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1위는 그린란드) 뉴기니는 면적 대비 언어 다양성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지역입니다. 뉴기니의 토착 언어들에 대해서도 다음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그런데 외부 어족의 유입이 오랫동안 차단되었던 호주와는 달리, 뉴기니의 토착 언어들은 티모르 섬 등 그 근방의 멜라네시아 섬들에도 퍼져 있고, 또 외부 어족의 언어가 뉴기니 섬에 유입되어 공존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외부 어족’은 이제부터 시작될 이야기의 주인공인 ‘남쪽의 섬들’, 오스트로네시아어족Austronesian languages입니다.

오스트로네시아인의 기원지 타이완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또는 남도(南島)어족이라는 이름이 생소할 지 몰라도, 소속된 언어 수로는 니제르·콩고어족Niger-Congo languages과 1, 2위를 다툽니다. 아프리카의 어족 이야기를 할 때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만데어족Mande languages 등을 니제르·콩고어족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은지 논란이 있는 데 비해,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라는 분류는 역사언어학적 기반이 잘 확립되어 있습니다. 또 인도·유럽어족이 항로 개척과 식민지 확장을 통해 세력 범위를 세계 전역으로 뻗치기 전,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퍼진 어족이 바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서로는 아프리카 앞바다의 마다가스카르부터 남아메리카 앞바다의 이스터 섬, 남북으로는 북태평양의 하와이에서 남태평양의 뉴질랜드라는 방대한 지역에 걸쳐 사용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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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으로 추정한 오스트로네시아인의 이주 경로. 타이완 섬이 원주지인 오스트로네시아인은 항해를 통해 해상 동남아시아Maritime Southeast Asia 전역과 오세아니아의 대부분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인도·유럽어족 연구가 유럽과 인도 및 이란의 언어들 사이의 어휘적 공통점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듯,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연구는 1706년 네덜란드의 동양학자 아드리안 렐란트Adriaan Reland가 말레이어Malay language와 태평양 서부 언어들의 단어가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시초입니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비교언어학적 연구가 수행된 것은 19세기부터이고, 지금과 같이 동남아시아의 바다와 오세아니아의 수많은 언어들을 한데 묶어 오스트로네시아 조어Proto-Austronesian의 기본어휘를 재구한 연구는 1930년대에야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중 많은 언어는 화자 수가 매우 적고, 최근에야 제대로 기록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하위 분류 연구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은 학설에 따라 4개에서 10개 정도의 어파로 나뉘는데, 특이하게도 타이완(대만)Taiwan 섬 한 군데에서 모든 어파의 언어가 사용됩니다. 누군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박물관이라도 짓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런 건 아니고,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기원지가 바로 타이완이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타이완 섬 바깥에서는 단 한 갈래의 언어들만이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이 언어들을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Malayo-Polynesian languages라고 하며, 나머지 어파들은 타이완의 토착 언어라는 의미에서 이 섬의 옛 이름을 딴 포르모사 언어들Formosan languages이라고 통칭합니다.

물론 현재 타이완에는 중화민국이 들어서 있습니다. 오랫동안 외부인에게 적대적이었던 섬에 한족의 왕래가 잦아진 것은 16세기부터인데, 한 세기 후에는 아예 청나라의 통치 하에 들어갔습니다. 대륙 중국의 영토로 편입된 타이완의 토착 부족들은 점차 한족에 동화되어 갔고, 일부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타이완 토착민들을 ‘고산족’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런 세월을 거치며 포르모사 언어들의 사용자 수와 사용 범위는 중국어에 밀려 매우 축소되었습니다. 지금은 타이완 인구의 2.3%를 차지하는 타이완 토착민들 중에서도 일부인 44만 명 정도만이 포르모사 언어를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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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편입되기 전 타이완의 포르모사 언어 분포.

현존하는 포르모사 언어는 모두 16개이고, 상당수는 사멸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실제로 사멸한 것이 알려진 언어만도 11개나 됩니다. 이 때문에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내의 계통 규명은 초장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위의 지도는 전통적인 분류를 따른 것인데, 포르모사 언어들을 총 9개 어파로 나눕니다. 이 어파들 간의 차이는 상당히 크지만, 동사가 문장 맨 앞에 오는 어순이나, 복잡하면서도 독특한 인칭대명사 체계 등 전형적인 오스트로네시아어의 특징을 공유합니다. 예를 들어 2010년에 사멸한 파제흐어Pazeh는 ‘너’를 포함하거나 제외하는 ‘우리’,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너’,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그’를 모두 구별합니다. 한편 타이완 남동쪽 바다의 란위 섬Orchid Island에서 사용되는 야미어Yami는 포르모사 언어로 취급되지만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에 속합니다. 그 중에서도 타이완과 루손Luzon 사이의 섬들에서 사용되는 바탄어군Batanic languages에 들어갑니다. 루손이 어디냐고요?

첫 번째 항해 : 필리핀어파

루손은 면적으로 세계 15위인 섬입니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가 위치한 섬이죠. 사실 필리핀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그 주변의 민도로Mindoro, 팔라완Palawan, 마스바테Masbate 같은 섬들까지 포괄하는 명칭입니다. 그리고 이 루손 지역은 기원전 2500년경 초기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타이완을 떠나 처음 정착한 곳으로 생각됩니다. 항해를 통한 이주는 계속 이어져 기원전 1500년경에는 이들이 필리핀 전역에 퍼졌고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Borneo와 말루쿠 제도Moluccas까지 도달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크게 두 집단으로 나뉘어 각각 서쪽과 동쪽으로 퍼져나갔고 오늘날의 넓은 분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필리핀에서 쓰이는 오스트로네시아 언어들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분화했을 테니 타이완만큼이나 다양하겠죠?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필리핀과 그 주변 섬들에서 사용되는 필리핀 언어들Philippine languages은 약 150개 정도로 수는 많지만, 서로 괄목할 만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는 적습니다. 타이완에서 가까운 만큼 필리핀 방향으로 여러 번의 이주가 있었고, 오늘날 필리핀 언어들의 조상이 되는 화자 집단이 마지막으로 이주하면서 기존에 쓰이던 다양한 언어들을 덮어버렸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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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모사(파랑)와 필리핀(군청) 언어들. 오늘의 여정에 필요한 지도입니다.

필리핀 언어들은 이름답게 필리핀 북부의 루손, 중부의 비사야 제도Visayas, 남부의 민다나오Mindanao와 그 주변 섬들에서 쓰입니다. 예외가 있다면 인도네시아 술라웨시Sulawesi 북부에서도 쓰인다는 점과, 술루 제도Sulu Archipelago와 팔라완의 일부 언어는 필리핀 언어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필리핀 언어들이 서로 그렇게 비슷하다면 왜 ‘어군’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필리핀 언어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가계도를 그릴 수 있는 언어들이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언어군의 느슨한 연결체linkage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 포스팅의 ‘방언 연속체’에 관한 부분을 읽어보면 좋습니다.) 즉 넓은 지역에 걸쳐 사용되던 공통 조어의 방언들이 점차 차이가 커지면서 분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연결체’라는 용어 자체도 같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서부 오세아니아 언어들West Oceanic languages을 연구하면서 처음으로 제안된 개념입니다. 이 언어들에 관해서는 다다음 포스팅에서 다루겠습니다.

필리핀 언어들 중 모어 화자 수가 가장 많은 언어는 영어와 함께 필리핀의 공용어인 타갈로그어Tagalog입니다. 사실 공용어로 지정된 타갈로그어의 정확한 명칭은 ‘필리핀어’Filipino인데, 필리핀에 토착 언어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별로 적절한 이름은 아닙니다. 필리핀어는 타갈로그어의 표준 형태standard variety인 셈인데, 미국에 양도되기 전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나라답게 스페인어 차용어가 상당히 많습니다. 모어 화자 약 2800만 명인 타갈로그어의 뒤를 세부어Cebuano가 2100만 명으로 바짝 뒤쫓습니다. 세부어는 관광지로 유명한 세부 섬Cebu이 소속된 비사야 제도 일부와 그 남쪽인 민다나오 대부분에서 사용됩니다. 타갈로그어와 세부어는 모두 중앙필리핀어군Central Philippine languages으로 분류됩니다. 900만 명으로 3위를 차지하는 일로코어Ilocano는 북루손어군Northern Luzon languages이라는 다른 어군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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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주요 언어·민족 지역 구분.

일로코어와 이름이 비슷한 일롱고어Ilonggo 혹은 힐리가이논어Hiligaynon를 비롯해, 비콜어군Bikol languages, 세부어와 와라이어Waray가 속하는 비사야어군Visayan languages, 민다나오의 다나오어군Danao languages 등 대부분의 주요 언어들은 중앙필리핀 대(大)어군Greater Central Philippine languages에 포함됩니다. 뿐만 아니라 술루 제도와 보르네오 북단에서 사용되는 타우수그어Tausug나 술라웨시 북부의 고론탈로어Gorontalo도 들어갑니다. 앞서 언급한 필리핀 언어들의 동질성은 이 중앙필리핀 언어들이 확산된 결과로 보입니다. 한편 필리핀에는 멕시코 스페인어의 어휘에 일롱고어, 타갈로그어, 세부어 등 필리핀 언어의 문법이 결합한 크리올인 차바카노어Chavacano가 존재하며, 36만 명이 사용하는 삼보앙가어Zamboangueño가 대표적입니다(크리올에 대해서도 앞선 링크를 참조하세요). 또한 보홀 섬Bohol에는 세부어 문법 기반에 어휘는 전부 새로 만들어낸 인공 언어 에스카야어Eskayan가 존재합니다. 이 언어는 모어로 쓰는 사람은 없지만, 에스카야 씨족의 기원 설화와도 결부되어 있고 독자적인 문자 체계도 있습니다.

포르모사 언어들과 필리핀 언어들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내에서 가장 보수적인 언어들입니다. 어휘를 만들 때 중첩reduplication을 활발하게 활용한다는 점이나, 음절 구조가 보통 ‘자음-모음(-자음)’으로 단순하고 사용하는 말소리도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은 다른 오스트로네시아 언어에도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하지만 어떤 결정적인 문법적 특징이 이 두 무리의 언어를 특별하게 만듭니다. 어떤 학자는 이 언어들을 유형적으로 묶어 ‘필리핀 유형 언어’Philippine-type languages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이 특징은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항해를 따라가는 여정의 다음 목적지, 보르네오 섬의 언어들에서도 나타나니, 다음 번 게시물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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