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에서 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략을 겪으며 쇠망했다고 했었습니다. 로마 제국과 게르만인은 카이사르 이래로 오랫동안 엎치락뒤치락 싸웠음에도 결판은 잘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4세기 후반부터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이 아예 로마 제국 영토 안으로 대거 이주를 시작하게 됩니다. 동쪽에서 건너온 기마 유목 민족, 훈족Huns의 이주에 떠밀린 것이었죠. 훈족에게 복속되거나 도망치거나 중에서 선택해야 했던 게르만 족장들은 나날이 약해져 가는 로마의 너른 땅으로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게르만 민족의 시간차 땅따먹기
게르만인은 원래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와 지금의 독일 북부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중 동남쪽 흑해 연안으로 세력을 넓혀 살고 있던 고트족Goths이 가장 먼저 훈족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고트족의 일파인 서고트족Visigoths은 먼저 동로마로 쳐들어갔고, 한때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로마군을 격파해 제국의 영토 안에서 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알라릭 1세가 로마 시를 침공해 약탈했고, 이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 서고트족의 왕국이 세워지고, 그 뒤를 동고트족Ostrogoths, 반달족Vandals, 부르군드족Burgundians 등 동게르만어군East Germanic languages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부족들이 따랐습니다. 이 고트족의 언어가 바로 인도·유럽어족 연구의 중요한 자료였던 고트어Gothic입니다. 아쉽게도 18세기 크림 반도 고트어Crimean Gothic를 마지막으로 현재는 동게르만어군의 모든 언어가 사멸했습니다.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를 끌어내리고 테오도릭 대왕이 이탈리아 반도에 동고트 왕국을 세우는 와중에, 게르만인의 또 다른 일파도 로마 제국의 땅을 할거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서게르만어군West Germanic languages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던 부족들인데, 이 중 에서 프랑크족Franks의 프랑크 왕국이 주변을 평정합니다. 카롤루스 대제 때 가장 강성했던 왕국은 그의 사후 아들들에 의해 삼등분됩니다. 각각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반이 되었는데, 독일을 제외하면 로맨스어권 국가들입니다. 그럼 프랑크족이 쓰던 말은 어디로 간 걸까요? 아마 오늘날의 네덜란드어Dutch로 대표되는 라인 강 게르만어Istvaeonic languages가 프랑크어의 후예라고 추측됩니다. 이후 네덜란드의 남아프리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아프리칸스어Afrikaans가 새로 갈라져 나왔습니다.
한편 410년 로마가 브리탄니아(지금의 영국)에서 철수한 이후, 잠자코 있던 부족들이 임자 없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영국 해협을 건넜습니다. 앵글족Angles, 색슨족Saxons, 유트족Jutes이 그들입니다. 이들의 언어도 서게르만어군에 속하지만, 프랑크어와 달리 북해 게르만어Ingvaeonic languages에 들어갑니다. 이 세 부족은 영국 남반부에 일곱 개의 왕국을 세우고, 이후 웨식스(서쪽의 색슨족이라는 뜻입니다) 왕국이 잉글랜드(앵글족의 땅이라는 뜻입니다)를 통일하게 됩니다. 오늘날 영국과 영어의 토대가 되는 것이죠. 물론 북해 연안의 부족들이 전부 브리탄니아로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 프리슬란트 주 등지에서 쓰이는 프리지아어Frisian는 현재 영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 중 하나입니다. 조금 덜 가까운 친척 언어들은 저지 독일어Low German라는 이름으로 독일 북반부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게르만어군의 나머지 한 갈래는 엘베 강 게르만어Irminonic languages입니다. 알레만니족Alemanni, 롱고바르드족Lombards, 수에비족Suebis 등이 사용했고, 이후 고지 독일어High German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남반부에서 사용되어 왔습니다. 사실 고지 독일어와 저지 독일어의 구분은 완전히 계통적인 것이라고 하기 애매합니다. 고지 독일어와 저지 독일어, 그리고 네덜란드어 등의 여러 방언들은 아주 예전부터 하나의 방언연속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죠. 근대에 들어서는 고지 독일어를 기반으로 표준 독일어가 성립했고, 저지 독일어 화자들은 표준어의 영향을 받아 두 언어의 차이는 약간 줄어들었습니다. 반면 스위스에서는 고지 독일어의 방언 중 하나인 상부 독일어Upper German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표준어를 제정했고, 지금도 독일과 스위스의 공용어는 똑같이 독일어이지만 그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프랑크와 잉글랜드를 필두로 게르만 왕국들이 점차 안정되어 가던 중, 북쪽에서 무시무시한 전사들이 유럽 곳곳을 침략합니다. 우리가 흔히 ‘바이킹’이라고 부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게르만족, 바로 노르만족Norsemen입니다. 노르만족은 서프랑크 왕국에 쳐들어가 노르망디 왕국을 세우고, 잉글랜드 왕국을 무너뜨리고 노르만 왕조를 개창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게르만어인 고대 영어Old English는 북게르만어군North Germanic languages에 속하는 고대 노르드어Old Norse의 영향을 받아 중세 영어Middle English로 변화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대 노르드어는 스칸디나비아의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페로 제도의 페로어Faroese, 아이슬란드의 아이슬란드어Icelandic 등의 후손을 남겼습니다. 이중 아이슬란드어는 망망대해에 둘러싸여 고립돼 있던 탓인지 복잡한 고대 노르드어의 문법을 상당히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스칸디나비아의 언어들은 명사와 동사의 수많은 굴절형을 대부분 없앴습니다. 페로어는 둘의 중간쯤 됩니다.
동로마의 위기 : 슬라브 민족의 남진
노르만인은 러시아의 기원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러시아의 전신인 키예프 루스Kievan Rus’의 최초 지도자가 바이킹, 루스 말로는 바랑기아인Varangian이었던 루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게르만어권 국가가 아닙니다. 러시아어는 인도·유럽어족이지만 슬라브어파Slavic languages, 그 중에서도 동슬라브어군East Slavic languages에 속하는 언어입니다. 동슬라브어군에는 이웃 나라의 우크라이나어Ukrainian와 벨라루스어Belarusian, 루신어Rusyn가 포함됩니다. 동슬라브인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핀·우그리아인, 발트인, 캅카스인 등과 융화되거나 접촉하며 발전했습니다.
슬라브 민족은 누구일까요? 다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난 시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로마 제국의 동쪽 절반은 무사했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새로운 세력들이 발칸 반도의 땅을 넘보고 있었습니다. 슬라브 조어Proto-Slavic를 사용하던 집단인 초기 슬라브인들도 그 중 하나입니다. 정확한 기원지는 알 수 없지만 5-6세기경 이주를 시작하여, 일부는 동게르만 부족들이 떠나간 중앙 유럽에 정착했고 다른 일부는 발칸 반도에 정착했습니다. 중앙 유럽의 슬라브인들은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였고 오늘날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의 기원이 됩니다. 폴란드어Polish, 체코어Czech와 슬로바키아어Slovak, 독일의 소르브어Sorbian는 모두 서슬라브어군West Slavic languages에 속합니다. 발칸 반도에는 꽤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이 존속했기 때문에, 남쪽의 슬라브인들은 동방 정교회의 영향을 받았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음 포스팅에서 알바니아어를 다룰 때 조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동로마 제국을 위협한 민족 중에는 튀르크 계통의 유목민 불가르인Bulgars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발칸 반도에 불가리아 제국을 세우고 위세를 떨쳤으나, 점차 선주민인 남슬라브인에 동화되어 갔습니다. 결국 튀르크어인 불가르어Bulgar를 버리고 고대 슬라브어가 슬라브화된 불가르인들의 언어가 됩니다.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 선교사 키릴과 메토디우스(‘키릴 문자’를 만들었다고 전하는 그 성인들입니다!)가 선교를 위해 고대 슬라브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이는 고대 교회 슬라브어Old Church Slavonic라는 표준화된 언어를 만들었습니다. 러시아 역시 정교회 국가인 만큼, 고대 교회 슬라브어가 일종의 상층어superstratum 역할을 해서 러시아어에 많은 영향과 차용어를 남겼습니다. 오늘날에는 불가리아어Bulgarian와 마케도니아어Macedonian, 슬로베니아어Slovene, 첫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BCMS어Serbo-Croatian가 남슬라브어군South Slavic languages을 이룹니다.
슬라브어를 배운다면 좌절할 만한 구석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우선 말소리부터 독특한데요, 자음 3-4개까지도 한 번에 이어서 발음되는 자음군consonant cluster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음군을 구성하는 자음의 종류도 통상적인 언어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 인삿말 Здравствуйте /zdrástvujt’e/는 zdr라는 세 자음 연쇄로 시작하는데, 마찰음인 z가 파열음인 d 앞에 오는 것은 공명성 위계sonority hierarchy를 위배하는 문제적 사례입니다. 이에 더해 체코어에서는 자음이 모음 역할을 하는 성절자음syllabic consonant까지 나타납니다. 유명한 잰말놀이tongue twister “Strč prst skrz krk”은 ‘모음이 없는’ 문장인데, 전동음 r이 음절의 중성이기 때문입니다. 액센트도 특징적인데, 러시아어 등은 음높이와 관계없는 강세 액센트dynamic accent를 보이는 반면, BCMS어 등은 음조 액센트pitch accent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법적 측면에서는 인도·유럽 조어의 복잡성을 상당히 보존하고 있어, 명사는 성·수·격에 따른 수많은 변화형을 보여줍니다.
고독한 전통주의자 : 발트 해 연안의 인도·유럽어
슬라브어파는 이웃한 발트어파Baltic languages와 상당히 가까워서, 함께 발트·슬라브어파Balto-Slavic languages를 이룹니다. 발트어파는 다시 서발트어파West Baltic languages와 동발트어파East Baltic languages로 나눠지는데, 고대 프로이센어Old Prussian가 서발트어파의 언어였습니다. 독일 기사단이 프로이센 지역을 점령하면서부터는 독일어권이 되었고, 나중에 독일을 통일하게 될 프로이센 왕국이 세워진 18세기 초반에는 서발트어파 언어가 모두 사멸했습니다. 그렇지만 동발트어파의 두 언어, 리투아니아어Lithuanian와 라트비아어Latvian는 생존해 있습니다. 흔히 ‘발트 3국’이라고 부르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중 앞의 두 나라가 발트어권인 것입니다. (에스토니아어는 우랄어족 핀어파입니다.)
발트어파의 특징은 현재까지도 옛 인도·유럽어의 특징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리투아니아어는 아마도 일상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 가장 보수적conservative인 인도·유럽어라고 할 만합니다. 예를 들어 리투아니아어 명사는 남성과 여성, 형용사, 대명사, 수사 등은 중성까지 세 가지 성을 갖습니다. 단수와 복수가 있고, 문법적 격은 표준어에서만도 일곱 개가 있습니다. 한편 동사 굴절형들이나 말소리의 측면에서는 인도·유럽 조어와 상당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독특하게도 리투아니아어는 자유 강세free stress 언어이고 두 가지 종류의 음조 액센트가 존재하는 반면, 라트비아어는 고정 강세fixed stress 언어임에도 장모음과 이중모음이 위치에 관계없이 세 가지 성조(평탄, 상승, 하강) 중 하나를 갖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음조 액센트의 또 다른 대표주자, 고대 그리스어를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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