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어난 이래 여러 언어들을 접하게 됩니다. 우선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어(또는 각자의 모어mother language)를 습득해 왔습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늦게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웠을 것입니다. 중학교에 가서는 ‘제2외국어’라는 이름 아래 또 다른 언어를 학습할 기회가 있었겠고요. 물론 배우지 않더라도 ‘이런 언어가 있다더라’ 내지는 ‘어디 사람들은 어떤 말을 쓴다더라’와 같이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다른 언어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정확히 몇 개 정도의 언어가 쓰이고 있는 걸까요? 잠시 추측해 봅시다.
정답은 없습니다. 약 5,000 ~ 7,000개 정도로 추정되기는 합니다만, 공신력 있는 언어(학) 전문 연구기관들에서도 제각각 수치를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걸까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 하나의 언어인지, 어느 말들이 서로 다른 언어인지’를 정하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기준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상호 의사소통 가능성mutual intelligibility이 있습니다. 간단하고 명료하죠. 서로 대화를 시도해서,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같은 언어, 알아듣지 못하면 다른 언어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민규와 부산에 사는 동원이는 서로 별 무리 없이 언어로 소통이 가능합니다. 비록 동원이의 말에는 민규가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간혹 있고, 또 높았다 낮았다 하는 억양도 있지만, 둘은 일상 대화부터 업무 회의까지 잘 해냅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 가능성을 확인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어떤 집단의 사람들과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민규와 동원이는 모두 하나의 언어—”한국어”—를 쓴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언어와 방언은 정말로 구별될까?
그렇지만 동원이의 말은 민규의 말과는 확실히 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은 각각 다르니까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신체적 조건과 삶의 경험이 다르니만큼 구사하는 언어의 양상 역시 다른 것이죠. 이를 개인어idiolect라고 합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동원이네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 동원이와 비슷한 억양으로 말하고, 같은 단어들을 쓴다는 사실입니다. 민규 역시 자기 동네 사람들의 말을 동원이네 동네 사람들 말보다 덜 어색하게 느낍니다. 같은 언어 안에서도 이렇게 지역, 계층, 성별 등의 요인으로 인해 방언dialect이 나타납니다. 민규는 경기도 광주에 사는 혜리의 말을 동원이의 말보다 좀 더 친숙하게 느낍니다. 민규가 혜리와 대화할 때에도 가끔 서로 모르는 단어가 있기도 하지만, 동원이의 생경한 어휘에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방언끼리도 가깝고 먼 정도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같은 한국어 내에서도 방언의 가깝고 먼 정도에 따라 이해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상식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사례를 들어볼까요? 포르투갈에서 쓰는 포르투갈어와 스페인 북서부에서 쓰는 갈리시아어Galician는 서로 의사소통이 됩니다. 그렇다면 언어학적으로는 포르투갈어와 갈리시아어를 하나의 언어로 묶어야 하지 않을까요?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가면 상황은 더 복잡해집니다. 덴마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는 상호 의사소통 가능성이 상당히 높으며, 특히 아래 표에서 보듯 노르웨이 사람들은 덴마크어와 스웨덴어를 상대적으로 더 잘 이해하지만, 스웨덴과 덴마크 사람들은 서로 이해도가 다소 떨어집니다. 이 세 언어들을 한 언어의 방언들로 분류한다면, 스톡홀름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이 덴마크어와 같은 말이라는 주장을 인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덴마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는 높은 상호 이해도에도 불구하고 정치, 문화, 역사적 경계를 기준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A집단의 말을 B집단이 알아듣고, B집단의 말을 C집단이 알아듣지만 A와 C는 서로 잘 의사소통하지 못하는 경우 A, B, C 언어는 방언 연속체dialect continuum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A와 C는 과연 같은 언어일까요, 다른 언어일까요? 신중한 언어학적 판단을 한다 해도 그 결과는 대상 언어마다, 연구자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 | 덴마크어 이해도 | 스웨덴어 이해도 | 노르웨이어 이해도 |
---|---|---|---|
덴마크 오르후스 | 3.74 | 4.68 | |
덴마크 코펜하겐 | 3.60 | 4.13 | |
스웨덴 말뫼 | 5.08 | 4.97 | |
스웨덴 스톡홀름 | 3.46 | 5.56 | |
노르웨이 베르겐 | 6.50 | 6.15 | |
노르웨이 오슬로 | 6.57 | 7. 12 |
때로는 언어 외적인 정치, 사회적 요인들이 언어학적인 논의에 앞서기도 합니다. BCMS어라고 들어봤나요? 보스니아-크로아티아-몬테네그로-세르비아어Bosnian-Croatian-Montenegrin-Serbian의 줄임말입니다. 이 국가들은 원래 함께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1990년대에 연방이 해체되면서 각 국가에서는 언어 규정 역시 분리를 시도해 왔습니다. 물론 스칸디나비아의 세 언어보다도 서로 차이가 거의 없는 방언들을 언어학자들이 독립된 언어로 인정할 리 없고, 시간이 흐르면서 차이가 충분히 벌어지기 전까지는 여전히 하나의 언어로 취급될 전망입니다. 또 프랑스의 경우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권도 다른 지방 언어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최근까지도 옥시탄어, 프로방스어 등을 별개의 언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patois(사투리)라는 표현으로 ‘비표준 프랑스어’인마냥 해당 언어들을 억압한 것이죠. 이렇듯 언어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 서로 애매하게 비슷한 말들을 독립된 언어로 분리시킬지 아니면 한 언어의 아주 다른 방언형으로 볼지는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구상의 언어 개수는 본질적으로 정확히 셀 수 없습니다.
언어 개수의 두 번째 변수 : 나타나고 사라지는 언어들
어찌저찌 나름대로의 기준을 설정하여 언어의 개수를 파악하려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숫자는 한 번 세면 영구불변인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서 다시 세 본다면 또 달라질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두 방언이 계속해서 달라져서 마침내 서로 완전히 의사소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두 말은 더 이상 한 언어가 아닌 독립된 언어로 취급되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문화적 간섭이나 흡수를 통해 존재하던 언어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가장 가슴아픈 일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인들로 인해 화자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중남미의 대부분 지역은 역사적으로 스페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습니다. 독립 후에도 스페인어가 사회의 주류 언어로서, 스페인어를 잘 하지 못하면 정부의 지원이나 구직 등에 있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스레 토착 언어들은 덜 쓰게 되는데, 지역 공동체에서나 쓰게 되다가 사용 범위가 가정 내로 한정되고, 자식들에게 토착 언어를 가르치지 않는 (또는 자식들이 배우려 하지 않는) 단계가 되면 토착 언어의 세대 간 전승은 끊기게 됩니다. 이때부터 언어의 사멸language extinction이 진행됩니다. 사용 인구는 계속해서 나이를 먹고, 결국 일부 노인들만 쓰는 언어로 남으면 사실상 그 언어의 미래는 없는 셈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미 사멸한 언어들, 지금도 사멸 도중이나 직전에 있는 언어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언어, 특히 토착 언어는 고유한 문화와 긴밀하게 연관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언어 사멸은 인류의 큰 문화적 손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으로, 이런 이유로 인해 오히려 죽어가거나 죽은 언어를 되살리려는 노력도 존재합니다. 미국의 원주민 핍박 역사가 끝나고 최근에 들어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기원과 정체성을 찾고자 토착 언어를 배우는 사례가 많습니다. 가장 성공적인 복원 사례는 아마 히브리어일 것입니다. 몇 천 년 전 성서를 기록했던 언어는 유대인들이 독립된 국가를 유지하는 데 실패하고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이디시어Yiddish , 라딘어Ladin등의 유대인식 지역 언어로 대체되었습니다. 20세기 초반까지 히브리어는 종교 의식에만 제한적으로 쓰이는 전례 언어liturgical language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유대인의 언어’를 부활시키고자는 주장이 거세졌습니다.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Eliezer Ben-Yehuda의 주도 하에 성서 히브리어Biblical Hebrew를 기반으로, 이웃의 유사한 언어인 아랍어 등을 참조하고 조어법을 통해 필요한 단어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오늘날 이스라엘의 2대 공용어 중 하나인 현대 히브리어Modern Hebrew가 탄생했습니다.
조금 덜 인위적인 언어 발생 방식도 물론 있습니다. 식민 지배나 무역 등으로 인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집단이 교류하게 되면 공용어가 필요해질 것입니다. 이때 만들어지는 언어를 피진pidgin 이라고 합니다. 피진은 문법이 극도로 단순하고 어휘는 참여 집단의 언어에서 조금씩 가져와 만듭니다. 그러니 피진으로는 제한적인 의사소통밖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피진이 한 세대만 거치면 완전한 체계를 갖춘 언어로 재탄생합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사용하는 피진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구조를 도출해 크리올creole을 만드는 것입니다. 크리올은 비록 기원적으로 영어나 프랑스어 등 모태가 되는 피진의 구성 언어와 일견 유사해 보일 수 있으나, 문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련성을 거의 찾을 수 없을 만큼 서로 다른 언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의 개수는 지금도 도처에서 늘어나고 줄어들기를 거듭하며 인간 언어의 시간적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역별로 몇 개의 언어가 있을까?
이 단락에서 소개하는 언어의 개수는 권위 있는 기관 중 하나인 SIL International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 International에서 제공하는 에스놀로그Ethnologue를 기준으로 합니다. 먼저 아시아가 2,300개로 현재 가장 많은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뒤를 아프리카가 2,143개로 바짝 뒤쫒고요. 그 다음 순서는 놀랍게도 태평양 지역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 기타 태평양의 많은 섬들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총 1,306개인데, 이는 남북아메리카의 언어를 다 합친 1,060개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면적과 인구를 고려하면 정말 엄청난 언어적 다양성이죠. 유럽은 고작 288개로 언어 다양성 측면에서 가장 빈약합니다. 대륙보다 더 잘게 쪼갠 지역별 언어들은 이후 포스팅에서 개별적으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주요 개념어
- 상호 의사소통 가능성
- 방언, 개인어, 방언 연속체
- 언어 사멸
- 피진, 크리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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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양재영 감수 김민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