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숫자의 개념이 없는 원시 문명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사냥을 하고 동굴로 돌아와서 부족 사람들에게 몇 마리의 동물을 잡았는지 그 성과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동굴 벽에 동물 마리수 만큼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동물 한 마리마다 조약돌 한 개를 모아 조약돌 뭉치를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8마리를 잡았을 때는 다음과 같이 보여줄 수 있겠죠.
그러나 늦은 밤, 그림을 그리거나 조약돌을 구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 모든 걸 말로 해야 할 때가 온다면, 이런 방법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말을 표현하고 싶은 숫자만큼 반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슴을 8마리 잡았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사슴 사슴 사슴 사슴 사슴 사슴 사슴 사슴”
그렇지만 표현하고 싶은 숫자가 더 커지게 되면 이 방법은 아주 고된 노동이 될 것입니다. 거북이 30 마리를 잡았다면 “거북이 거북이 거북이 …”라고 30 번이나 말해야겠지요. 그렇게 말한다고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획기적인 방법을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신체부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당장 주변에 아무 물건이 없어도 내 몸은 언제든지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신체부위 중에서 (조약돌처럼) 비슷한 모양을 가진 것이 여러 개 있는 부위가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손가락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의 신체는 왼손과 오른손에 각각 다섯 개의 손가락이 있습니다. 이 손가락을 모두 접은 상태에서 하나씩 피면서 그 개수를 세는 방법을 떠올려 봅시다.
엄지손가락을 펴면 하나, 검지를 펴면 둘, 중지는 셋, 약지는 넷, 새끼손가락은 다섯이 됩니다. 이것을 펴서 보여주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듣는 사람도 이 손가락과 숫자의 대응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법을 계속 사용하다 보면, 손가락의 명칭만으로 숫자를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약 8,000 명이 사용하는 오크사프민어Oksapmin language가 바로 이러한 시스템의 예시입니다.
신체부위 | 숫자 |
엄지손가락 | 1 |
검지손가락 | 2 |
중지손가락 | 3 |
약지손가락 | 4 |
새끼손가락 | 5 |
이런 체계를 “신체부위 체계”라고 부릅니다. 이 체계에서 “물고기를 새끼손가락 마리 잡았어”라는 말은 물고기를 5 마리 잡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손가락은 다섯 개 밖에 없습니다. 물고기를 여덟 마리 잡아왔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사용 가능한 신체부위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손가락만으로 숫자를 세지 않고 신체의 한 부위와 숫자를 임의로 일대일 대응시킨 체계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크사프민어에서는 다음과 같은 체계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오크사프민어에서 숫자 8을 나타내려면 팔꿈치를 말하면 되고, 오른쪽 어깨는 10, 왼쪽 손목은 22를 나타냅니다!
1 | tipun | “엄지” |
2 | ləwatipun | “검지” |
3 | bumlip | “중지” |
4 | xətlip | “약지” |
5 | xətxət | ”새끼손가락” |
6 | xadəp | “손목” |
7 | bes | “팔뚝” |
8 | amun | “팔꿈치” |
9 | tuwət | “위팔(상박)” |
10 | kat | “어깨” |
11 | gwel | “목 옆” |
12 | nat | “귀” |
13 | kin | “눈” |
14 | lum | “코” |
15 | kin tən | “반대쪽 눈” |
16 | nat tən | “반대쪽 귀” |
17 | gwel tən | “반대쪽 목 옆” |
18 | kat tən | “반대쪽 어깨” |
19 | tuwət tən | “반대쪽 위팔(상박)” |
20 | amun tən | “반대쪽 팔꿈치” |
21 | bes tən | “반대쪽 팔뚝” |
22 | xadəp tən | “반대쪽 손목” |
23 | xətxət tən | “반대쪽 새끼손가락” |
24 | xətlip tən | “반대쪽 약지” |
25 | bumlip tən | “반대쪽 중지” |
26 | ləwatipun tən | “반대쪽 검지” |
27 | tipun tən | “반대쪽 엄지” |
가운데 14 (코) 를 중심으로 대칭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래서 그는 여덟 밤 동안 돌아오지 않았어” 라는 문장을 말하기 위해 오크사프민어에서는
- “jəxə amunxe dik jox napingoplio“
(직역: 그래서 그는 팔꿈치 번 돌아오지 않았어)
라고 말하게 됩니다.
한술 더 떠서, 파푸아뉴기니 산악지대에서 약 10,000 명이 사용하는 코본어Kobon language는 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와서 세는 것을 반복하여 계속해서 숫자를 올려갑니다.
왼손 새끼손가락에서 시작하여 쇄골을 지나 오른쪽 새끼손가락까지 간 뒤, 다시 쇄골을 통해 왼쪽 새끼손가락으로 넘어오면 총 23을 세게 됩니다. 이렇게 한 번 더 반복하면 46이 됩니다.
이렇게 큰 수를 말하기 위해 신체부위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당신은 이런 생각을 떠올릴 것입니다. ‘여러 번 반복하는 과정을 한 마디로 줄이면 훨씬 빠르지 않을까?’
손 하나에 손가락이 다섯 개 있는 것을 이용해서, 5 를 하나의 묶음으로 센 뒤, 나머지를 말하는 방법을 떠올리게 됩니다. 즉, 8이라는 숫자는 “손 하나 (=다섯 손가락) 그리고 세 손가락”이 되는 것이죠. 즉, 5+3=8 입니다. 처음으로 우리는 숫자를 표현할 때 덧셈이라는 연산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등지에서 약 12,000 명이 사용하는 바니와어Baniwa language가 이러한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한 손, 두 손처럼 큰 단위를 한 단어로 줄여서 말하는 것은 이른바 “진법 체계”로 진화하게 됩니다. 진법 체계에서는 큰 수는 단위 수로 쪼갠 다음에, 나머지를 더하는 방식으로 숫자를 셉니다. 그것을 공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 식은 b 진법을 가진 언어가 큰 수 X 를 표현하기 위해 X 를 분해하는 방식입니다. 이 때, b 를 진수라고 합니다.예를 들어 한 손을 진수로 하는, 즉, 5를 진수로 하는 체계에서 17은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이 때 진수에 붙는 n 을 계수라 하고, r 을 나머지수라고 합니다. 17은 5가 3개 있고 거기에 2가 더 있는 수이므로, 계수는 3이고 나머지수는 2입니다. 즉 5진법을 사용하는 언어에서는 17을 아래와 같이 표현할 것입니다.
- 5가 3 개, 그리고 2개
콜롬비아의 7,800 명이 사용하는 차미어Chami language의 예시를 들어 보겠습니다. 차미어의 1에서 5까지의 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 ɑbɑ
- ume
- ũpea
- kʰĩmɑ̃rĩ
- huesomɑ
그리고 17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huesomɑ ũpeɑ-kʰɑri ume
다섯 셋—그리고 둘
마찬가지로 18과 19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 huesomɑ ũpeɑ-kʰɑri ũpea (다섯 셋—그리고 셋)
- huesomɑ ũpeɑ-kʰɑri kʰĩmɑ̃rĩ (다섯 셋—그리고 넷)
이렇게 진법의 개념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엔 한국어의 수사를 알아볼까요? 한국어는 굉장히 큰 수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57,684
오만 칠천육백팔십사
o-man chil-cheon-yuk-baek-pal-sip-sa
이것를 수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어의 수사 체계는 십진법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수사 체계입니다. 이렇게 더 높은 단위의 진수를 쓰는 체계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요 개념어
- 수사
- 신체 부위 체계
- 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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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김민규 감수 양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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